[IOI2009] 조교는 무슨 일을 하는가? (1) 문제 번역

* 이 글은 제 21회 국제정보올림피아드와 관련된 글의 일부분입니다. 전체 글 목록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너무 놀고 온 얘기만 쓰다 보니 사람들이 정말로 놀기만 하고 온 걸로 오해할까봐, 네 사실입니다 주제를 바꿔서 한 번 써 봅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도 한국에서 8차례 정도 주말교육을 하거나, 이런저런 잡일들을 하거나 하지만, 현지에서는 대충 3가지 정도 역할을 맡는 것 같습니다.

  • 문제 번역 보조
  • 현지 적응 모의고사 진행
  • 기타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자, 조교가 IOI에 참석하는 공식적인 이유는, 바로 첫 번째 항목입니다.

IOI의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영어로 출제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Contestant들이 중~고등학생인데 '무조건 영어로 읽어!'라고 하면 너무 가혹하니, 각 팀의 재량껏 자국어로 번역된 문제를 추가로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1)

그렇다면 문제. 영어 문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누구의 몪일까요?
1. 주최측
2. 한국 정부에서 파견된 전문 번역가
3. 교수님들과 조교

......해서 문제 번역은 각 팀의 Leader, Deputy Leader, 일부 Observer와 Visitor가 담당하게 됩니다.

대회에서 사용될 문제는, 전날 밤에 Contestant들과 격리된 장소에서 열리는 GA Meeting에서 처음 공개됩니다. 각 팀마다 문제가 한 부씩 주어지고, 10~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다음, 문제들을 그대로 채택할지, 혹은 일부를 기각시킬지 투표를 통해 결정하게 되지요. 물론, 왠만하면 별 문제 없이 채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번 IOI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2)

그 다음에는 바로 문제를 한국어로 번역 시작. 올해의 경우에는 하루에 문제가 4개씩 출제되었고, 교수님도 네 분이었으므로 1인당 1문제씩을 담당하셨습니다. 주최측에서 MS Word가 깔린 번역/인쇄용 PC를 제공했지만, 한국어 입력기도 안 깔려 있고 폰트도 안 깔려 있으므로 무용지물이었고3), 교수님들과 조교는 각자 지참해 온 노트북으로 작업을 합니다.

교수님들이 번역을 하고 계신 동안, 조교는 Overview와 Technical Info Sheet의 일부를 번역하고, 또 Scientific Committee에서 영어 문제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므로 이를 확인하고 있다가, 새로운 버전이 올라오면 파일과 인쇄본으로 교수님들께 전달해 드립니다. 아무래도 이 때는 조교가 할 일이 별로 없는데, 그 동안은 미리 문서 템플릿을 만들어 놓거나, 교수님들께 커피를 공급해 드리거나, 빈둥거리고 있거나 합니다.

영어 문제가 모두 확정되고, 교수님들이 슬슬 번역을 끝내실 즈음 본격적으로 조교가 할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선 교수님들마다 서로 다른 문서 형식을 하나로 맞춘 후, 각각 n부씩 인쇄해서 교수님들께 전달합니다. 그 다음에는 모두 함께 문제들을 한 번씩 읽으면서, 번역이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는 작업 ― 업계 용어로 이를 보통 '문제 Reading' 정도로 지칭합니다. ― 이 무한정 이어집니다. 그 동안 계속 조교는 문제들의 버전 관리를 수동으로 진행합니다.

특히 문제 Reading 과정에서, 아무래도 조교가 교수님들보다 '학생들이 어떤 표현을 관용적으로 쓴다.'거나 '어떻게 서술해야 잘 이해한다.'거나 하는 걸 잘 파악하고 있으니, 이것저것 수정하고 싶은 것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특히나 애초에 문제 원본에서 설명을 이상하게 해 놨거나, 혹은 수식어를 콤마로 잔뜩 이어 놓는 등의 영어식 표현이 있을 경우,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아주 애를 먹고, 심지어는 한 문장을 번역하는 데 수십 분이 걸리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은 '이렇게 번역하나 저렇게 번역하나 문제 이해하는 데 별 문제 없어요.'이지만 말이죠.4)

그렇게 해서 대충 번역이 다 다듬어지면 어느새 시계는 새벽 4~5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애초에 영어권 국가들은 번역을 하지 않으며, 기타 유럽계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도 비교적 번역이 용이하므로 새벽 2~3시쯤이 되면 작업을 마무리짓기 마련이지요. 중국어와 같이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팀이 여럿 있을 경우에는5), 서로 일을 나눠서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정도의 시간이 되면 한국 팀과 일본 팀을 비롯한 몇 개 팀, 그리고 이들의 번역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주최측 담당자들만 쓸쓸히 남아 있게 됩니다.

어쨌거나 문제 Reading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최종 확인을 한 후, 번역된 문제 파일과 인쇄본 5부 ― 이 중 4부는 학생들이 대회 당일에 전달받고, 1부는 주최측이 보관합니다. ― 을 제출하는 것으로 모든 작업이 끝납니다. 올해의 경우 대회 1일차에는 새벽 6시, 2일차에는 새벽 5시쯤에 작업이 끝났지요.

번역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충 이렇게 생겼습니다. 제가 사람들이 일하는 데 옆에 가서 사진을 찍을 만큼 대담하지는 않아서, 사진들은 모두 공식 홈페이지에서 퍼 온 것들입니다.


번역이 끝나면 일단 잠을 자고, 다시 다음 날 아침부터 번역을 했던 곳에서 기다려야 하는데, 학생들의 질문이 들어오면 이를 번역하기 위함입니다.6) 사실 학생들의 질문은 거의 들어오지 않으므로 이 때를 이용해 IOI Conference가 동시에 열립니다. 영어임에도 불구하고 왠만하면 들어보려고 했으나, 전날 잠을 거의 못 잔 탓에 너무나 졸렸습니다......

Conference가 끝난 다음에는 교수님 방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문제 해법을 고민하며 대회가 끝나길 기다립니다. 학생들이 얼마나 문제를 잘 풀 것인지 예측해 보기도 하죠. 사실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중간에 몰래 문제 해법에 대한 힌트를 넣어 놓으면 안 될까.'라는 헛된 기대를 하는데, 제가 해 본 바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번역하는 동안 해법이 안 떠오르거든요. (계속)


1) 대조적으로 대학생들이 대상인 ACM-ICPC는, 가혹하게도 문제를 영어로만 제공합니다.

2) 아주 가끔씩 왠지 자국 학생들이 잘 풀지 못할 것 같은 문제가 나오면 태클을 거는 팀이 있기도 합니다.

3) Scientific Committee쪽 관계자에게 가서 말했더니, 잠시 후에 돌아와서 "담당자가 다른 곳에 있어서 부르기 힘드니, 그냥 편집은 노트북으로 하고, 인쇄는 PDF로 변환해 와서 하는 게 어떻겠느냐."라는 답변을......

4) 학생들이 몇 년간 계절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이미 번역어투에 잘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5) 중국어의 경우에는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의 4팀.

6) 사실 저는 대회 2일차에는 너무 졸려서 그냥 자긴 했습니다만......

by 강원 | 2009/09/24 01:39 | 잡지식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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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그래요 at 2009/09/24 09:54
번역순서 보통 한국팀이 꼴찌라던데:)
내가 갔을때는 동남아 팀인가... 아마 태국쪽 팀이 꼴찌여서 연속꼴찌 기록을 세우진 못함(응?)
Commented by 강원 at 2009/09/24 18:58
이번에는 꼴찌는 아니고, 뒤에서 4~5등 정도에 끝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음.
<del>그게 다 조교가 유능해서</del>...... 는 아니고,
올해 문제가 4개로 늘어서 Leader 한 명만 참가하는 팀들이 고전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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